채식과 에코페미니즘
/정고미라
(한국여성건강학회, 2001)
1. 머리말
2. 채식 옹호의 담론들
1) 동물 살생 및 영적 건강
2) 육체적 건강 및 환경문제
3. 에코페미니즘과 동물에 대한 고려
1) 동물억압의 현실
2) 여성억압과의 연관성
3) 자연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4. 채식의 여성주의적 의미:
1) 기존의(남성의) 동물권 이론들
2) 보살핌의 윤리학
5. 맺음말: 페미니스트는 채식해야 하는가?
1. 머리말
지난 몇 년 사이에 채식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98년부터 통신상에서 채식동호회가 활성화되기 시작하여 현재 많은 동호회들이 생겨났고 채식식당들도 늘어나고 있다. 매스컴에서도 채식을 주제로 하는 기사 및 방송들이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
서구와는 달리 오랫동안 채식을 위주로 하는 음식문화를 이어온 한국에서 채식이라는 개념은 새삼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현실은 이미 너무나 서구화된 식생활로 변화되어 있다. 새로 생기는 음식점들은 모두다 고깃집이고 패스트푸드점들은 육식을 위주로 한다.
뿐만 아니라 채식을 하겠다고 결정을 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현실적으로 채식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기도 하다. 나물반찬, 김밥, 국, 볶음밥, 김치전, 그 어느 하나에도 고기가 소량이나마 들어가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반찬에 들어간 다시다, 라면 스프, 과자에 들어간 쇼트닝, 빵에 들어간 계란 등, 동물성 성분은 그야말로 사방에 만연해있다. 국민의 육류소비가 17년새에 2.5배로 늘어났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그런데 광우병 파동으로 서구에서는 쇠고기 소비량이 상당히 줄어들었고 돼지에게서 발생한 구제역 및 여타의 전염병들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소비량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새로이 등장한 채식에 대한 관심은 먹거리로서의 ‘안전성’에 대한 염려와 연관된다.
그래서인지 채식이라는 주제를 여성 혹은 여성주의와 연관지어 이야기하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 연관성을 쉽게 파악하지 못한다. 채식은 음식에 관한 기호, 또는 건강을 위한 선호 정도의 차원에서, 그도 아니면 종교적 신념의 차원에서 이해되는 반면에, 여성주의라고 하는 것은 억압, 차별, 해방, 정의에 관해서 다루는 정치적인 영역이어서 별개의 것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여성주의 이론들은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임을 드러냄으로써 자연적이고 본능적인 것에 속한다고 여겨지는 섹슈얼리티가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밝혀냈다. 무엇을 사적인 것으로, 자연적인 것으로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가 바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인 것이다.
또, 에코페미니즘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의 연관성에 주목함으로써 남성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가 하나의 통합적인 억압체계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위계적 이분법적 사고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주체와 대상을 분리시키는 근대성의 모순에 대해 성찰적이기를 요구하는데, 이것은 페미니스트 주체에 대한 성찰을 포함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페미니스트 주체는 스스로가 선을 긋고 있는 바로 그 경계선에 대해 자각할 필요가 있다.
채식이라는 화두는 여러 가지 차원에서 접근될 수 있다. 한편으로는 건강, 영성, 사회문제(기아, 환경오염)에 대한 고려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물억압에 대한 고려가 있다. 전자가 인간중심적인 관점이라면 후자는 인간중심성을 탈피하려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양자가 뚜렷하게 구분될 수만은 없는데, 인간의 문제와 비인간 자연의 문제가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에코페미니즘은 이러한 통합적 관점의 중요성을 인식함에 따라 이분법적인 선택의 패러다임을 벗어나서 전일적이고 맥락적인 문제의식을 포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나는 이 글에서 에코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왜 채식에 대한 고려가 등장하는지를 보이고자 하며, 이것은 기존의 채식옹호(동물권) 담론과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이것이 결국 페미니즘 자체에 대해 어떤 함의를 갖는지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2. 채식 옹호의 담론들
1) 살생과 영적 건강
채식에 대한 담론은 오래전부터 종교적 계율의 차원에서 존재해왔다. 불교를 비롯하여 많은 동양의 종교들은 살생을 금하는 맥락에서 채식을 권장하였고 오늘날의 명상수행 단체들 중에서도 채식해야만 입문할 수 있는 단체가 있다.
모든 생명체들에 대해 자비의 마음을 품고 대하라는 명령은 모든 생명체들이 기운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에 바탕한 것이며 영성에 대한 자각은 그러한 사실에 대한 체험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보인다. 깨달음을 얻었다고 일컬어지는 성인들은 만물과 하나가 되는 경험을 했다고 하는데 이들은 대체로 채식과 소식(단식)을 한 것으로 나타난다.
불교 및 윤회를 옹호하는 관점에서는 살생은 여러 생애를 거쳐서 갚아야 할 업이 된다고 한다. 업을 모두 소멸시킬 때까지 윤회는 지속된다고 하는데 사람에 대한 살인은 몇 생애에 걸쳐 인연을 맺으며 갚아야 한다고 하고 동물에 대한 살생도 제각기 다양한 기간의 빚을 지는 것으로 일컬어진다.
한 연구에 따르면 동물을 먹음으로써 그 오라가 중첩되는 기간은 소가 1-3년, 돼지가 3년, 개는 50년 등이다. 반면에 곡식과 채소는 불과 몇 시간밖에 안된다고 한다. 이를 통해 식물도 생명이지만 빚지는 정도가 비교가 안될 정도로 낮다는 것을 시사해준다.2)
오늘날의 신과학에서도 유사한 관점이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파동에 대한 연구들은 특정 기운이 물질 속에 새겨지는 현상을 보고하는데(방건웅:1997; 최원철:1998), 이런 관점에서 보더라도 죽임을 당하는 동물의 몸 속에는 원한으로 인한 부정적인 파동이 남겨진다는 이야기가 된다.
우리나라는 서구에 비해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이해하는 통합적인 사상들의 전통을 이어왔다고 할 수 있는데, 뜨거운 물을 식힌 후에야 땅에 버리는 일에서 알 수 있듯이 미생물마저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이 생활 속에 배어있었다. 현대에 와서 우리의 자연관은 서구적인 것으로 변화하여 자연은 인간을 위한 자원과 도구에 불과한 것으로 강등되었다.
자연 속에는 더 이상 그 어떤 신성함도 영성도 없다는 것이 사회의 공식적인 입장이 되었다. 따라서 현대의 채식 옹호 담론은 이러한 물질중심적, 인간중심적 관점에서 주로 표현된다. 그리하여 영적 건강을 위해 살생을 제한하라는 명령 대신에, 육체적 건강을 위해 고기를 제한하라는 의학적 권고와, 자원의 합리적 활용을 위해서 육식문화를 제한하라는 사회적 권고가 제시되는 것이다.
2) 육체적 건강 및 환경문제
육식이 몸에 해롭다는 의학적 연구들은 육식을 위주로 하는 서구에서 주로 나타났다. 정부의 보조금으로 인해 고기의 값이 싸게 유지되는 상황에서 국민의 육식 및 동물성 식품 소비는 꾸준히 증가하였다. 그러나 각종 암과 성인병 역시 꾸준히 증가하였고 의학계에서는 마침내 육류소비량을 줄일 것을 강력하게 권고하기에 이르렀다.
동물성 식품이 몸에 해로운 것으로 드러난 원인에는 가축들의 조건이 점차로 열악해진 사실이 관련되어 있다. 과거와는 달리 축산업은 보다 많은 이윤을 내기 위해 사료가 고기로 전환되기까지의 과정을 가능한 한 짧게 줄이며, 동물 한 마리당 높은 생산성을 내기 위해 불필요한 인도적 조건들은 생략하고 가축을 최대한 착취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고기는 농약, 항생제, 성장촉진 호르몬의 덩어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오염된 음식이 된 것이다.
동물성 지방을 많이 섭취하게 되면 세포막의 유연성이 떨어진다. 병에 대한 저항력의 모든 것을 조절하는 T-임파구의 세포막도 예외는 아니다.
또, 제초제와 농약이 뿌려진 풀을 소가 먹었을 때 그 독소들은 지방에 저장되기 때문에 동물의 지방층은 독소의 저장고라고 할 수 있다. 우유는 혈액 속의 성분을 농축시킨 것이므로 깨끗한 소의 우유가 아니고서는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이상구:1996)
영양적 측면에서 보면 단백질 과잉은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골다공증 발생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 단백질 섭취라고 한다. 아무리 칼슘 섭취를 많이 해도 단백질 섭취가 많으면 뼈에서 빠져나가는 칼슘의 양도 그만큼 더 많아지는 것이다.
또, 단백질 과잉은 신장결석과 암을 초래한다. 일반적으로 동물성 단백질을 더 높이 평가하려는 이유는 필수아미노산 때문인데 곡물 단백질과 콩 단백질을 혼식하게 되면 서로 부족한 것을 상호보충함으로써 육식에 뒤지지 않는 완전단백질이 되기 때문에 반드시 육식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이상구:1996; 로빈스:1999)
환경적 차원에서의 문제는 다음의 몇가지를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축산업은 삼림벌채와 사막화를 일으키는 주요원인이며 야생생물의 멸종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또, 이들이 방출하는 메탄가스는 지구온난화의 요인이다.
소 1마리의 배설량은 16 사람분이어서 미국에서는 육류산업의 유기배설물오염이 모든 산업을 합한 양의 4배가 된다. 미국의 경우 가축을 위해 사용되는 물은 전체 소비량의 절반에 해당된다. 고기 1kg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밀 1kg이 필요한 양의 100배가 소모되며 쌀의 10배가 소모된다.
사회적 차원에서는 제3세계의 빈곤과 기아문제가 걸려있다. 소와 기타 가축들은 지구상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1/3을 먹어치우고 있으며 미국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70% 이상이 가축의 먹이로 제공된다. 반면에 전세계적으로 해마다 3000만명의 사람들이 굶어죽고 8억 이상의 인구가 만성기아 상태에 놓여있다.
그런데도 현재 제3세계의 토지의 상당부분은 가축사료를 생산하는 데에 이용되고 있다. 식량이냐 사료냐 하는 문제가 대두되는 것이다. 1970년대 말에는 중앙아메리카 전체농토의 2/3를 가축들이 점유하게 되었고 그 대부분은 북미에서 소비되었다.
즉 미국에서 수입되는 햄버거 하나를 위해서 6평방야드의 숲이 발가벗겨지게 되는 것이다. 토지소유주들과 다국적기업들은 토지 점유를 확대하면서 점점 많은 부분을 목초지로 이용하고 있다.(푸른생명채식연합:2001)
이처럼 수많은 이유로 채식이 보다 바람직한 선택임을 점점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논거들은 여전히 인간을 중심에 놓은 채 자연을 덜 착취하는 것이 인간에게도 유리하다는 관점을 대변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비인간 자연은 오로지 인간이라는 주인공을 위해 수단적 가치를 갖는 ‘환경’에 불과한 것일까. 고기를 먹지 않는 원인을 그것이 인간의 건강에 이롭지 않다는 데에서만 찾아야 하는 것일까. 만일 건강에 좋은 방식으로 조작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육식은 권장할 만한 것으로 다시 바뀌는 것일까. 동물 자체에 대한 고려는 할 필요가 없는 것일까.
3. 에코페미니즘과 동물에 대한 고려
1) 동물억압의 현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동물과 마주칠 기회가 적다고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도시인들도 날마다 한두번은 동물들과 직접적으로 마주치는 순간들이 있다. 바로 식탁 위의 고기라는 형태로 마주친다. 그러나 김밥이나 샌드위치 속의 햄을 보면서는 물론이고, 돈까스를 먹을 때조차 돼지라는 동물을 떠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의식차원에서 그 고기가 돼지라는 동물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안다고 할지라도, 지극히 추상화된 의미로만 다가오기 때문에, 어떤 구체적인 돼지가 어떤 구체적인 과정을 거쳐서 이 형태로 출현하게 되었는지를 실감하면서 먹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아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육류소비자들은 평생동안 도살장을 구경해보지 못한다. 어떤 동물이 식탁에 오르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게 되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오늘날 우리가 먹는 고기는 과거에 사람들이 동물을 사육해온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현대식 축산업은 점점 공장식으로 변해가고 있고 가축은 더 이상 우리와 유사한 이웃생명체로서의 동물이 아니라 높은 생산성으로 이윤을 뽑아내기 위한 자원과도 같은 것으로 개념화되고 있다.
“동물들은 저가의 가축사료를 고가의 고기로 전환시키는 기계처럼 다루어지며, 영농인은 값싼 ‘전환비율’을 결과한다면 어떤 개혁방식이라도 채택하려 할 것이다”(싱어:176)
동물의 고통과 복지에 대한 관심없이 산출되는 이윤에 초점이 맞추어질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살펴보자. 여기서는 미국의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보겠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다른 점들도 있겠지만 자료가 부족하고 크게는 유사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전제해도 될 것이다.3)
사람과 마찬가지로 동물들은 신체가 속박되는 것을 원치 않고 애정으로 보살핌을 받은 이들은 그렇지 않을 경우에 비해 훨씬 더 건강하게 자라난다.
그러나 축산업의 관점에서는 가축이 병이 나거나 죽을 정도로 아프다 해도 도살장으로 끌려갈때까지만 약으로 버티며 살아남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로빈스:184) 각종 질병에 대한 ‘땜질’을 위해 항생제와 약물이 남용되고 있으며 이들의 복지에 대한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닭들은 건강이 아니라 무게에 따라 값이 매겨지기 때문에 그들에게 주는 모이 역시 최대한 값싸게 무게를 극대화하는 데에 선택 기준이 두어진다.(107) 미국의 정부 보고서에 따르면 전국의 대다수 양계장에 있는 닭들의 90% 이상이 닭암에 걸려있다고 했다.(109)돼지들의 대다수도 도살 시점에 폐렴과 위궤양에 시달리고 있다(로빈스:156)
죽기 하루나 이틀 전에 먹은 음식은 살코기로 전환되지 않기 때문에 동물들은 굶주린 채 트럭에 조밀하게 쑤셔넣어지고, 운송과정에서 일부가 사망하는 것은 정상적인 예상된 손실로 여겨진다.(175)4) 도살과정에서 동물들은 앞서 도살된 동족들의 피냄새를 맡으며 공포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안락한’ 도살방법에 드는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동물의 고통은 뒷전으로 밀리기 일쑤이다.
현대식 가축공장에서는 동물들이 극도로 밀집된 공간에서 사육된다. 닭들은 ‘밧데리 새장’이라는 곳에서 날개 한번 펴지 못한채 평생을 갇혀지내고 암퇘지들은 뒤로 돌아설 수조차 없는 좁은 쇠우리 속에서 지낸다. 열악한 공간 속에서 동물들은 스트레스가 쌓여 공격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데, 닭들은 서로를 쪼아대어 죽이기도 하고 돼지들은 서로의 꼬리를 물어뜯는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공간의 확장이 아니라 닭의 부리 자르기, 돼지의 꼬리 자르기와 같은 도구적 방식이다. 동물들의 이러한 행동은 손실을 가져다주는 ‘나쁜’ 행동으로 해석될 뿐이기 때문이다.
축산업의 현대화는 동물에 대한 착취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특히 암컷에 대한 착취가 심화되었다. 오늘날의 젖소는 과거에 비해 3배 이상의 우유를 만들어내며 수명은 과거에 20-25년이던 것이 지금은 4년이 채 못된다고 한다.
이들은 항상 임신중이며, 연이은 새끼 낳기와 운동할 여유라곤 전혀 없는 생활방식으로 말미암아 신경계가 망가져가는데, 요즘의 젖소는 더 이상 온유한 짐승이 아니라 너무 과민하고 무리하여 종종 진정제를 먹어야 할 정도가 되었다.(185) 현대식 양돈업도 1년에 6마리를 낳던 것을 20마리 이상으로 끌어올렸고 그 정도를 점차 높여가고 있다.(140)
그리고 닭들이 꼼짝없이 알만 낳는 기계로 둔갑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동물의 암컷들은 새끼를 끊임없이 생산해내도록 강요받으며 동시에 끊임없이 새끼들을 박탈당하고 있는 것이다.
동물들은 사람의 음식으로 둔갑하기 위해서 억압당하기도 하지만, 사람의 다른 종류의 필요(?)를 위해서도 생체실험을 당함으로써 고통받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물실험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이것이 동물들에게 어떤 고통과 죽음을 가져다주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특별히 알려는 마음이 없다. 왜냐하면 동물실험은 인간을 위한 필요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수많은 동물들이 해부당하고, 전기충격을 당하고, 냉동되고, 가열되고, 감압실에 넣어지고, 약물로 눈이 타들어가고, 해부되고, 가스처리되고, 방사선에 쬐이고, 분쇄되고, 마비되고, 손발 등을 절단당하고, 뇌를 제거당하고,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약물중독되고, 의도적으로 질병에 감염되고 있다.
그러나 “수없이 많이 시행된 실험들 중에서 극히 일부만이 중요한 의학 연구에 이바지한 실험으로 간주될 수 있다. 많은 동물들이 대학의 임학과 및 심리학과에서도 이용된다. 그리고 그 이상의 동물들이 상업적인 목적에 이용되며 화장품, 샴푸, 식용색소, 그리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다른 품목들의 실험에 이용되고 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우리 종 구성원이 아닌 존재의 고통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우리의 편견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동물 실험 옹호자들은 동물들이 고통받는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동물의 고통을 부정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실험이 인간의 목적에 어느 정도 기여한다고 주장하려면 인간과 동물들간의 유사성을 강조해야 하기 때문이다.”(싱어:89-90)
의약품 제조를 위한 실험마저도 우리의 건강을 증진시킬 목적으로 수행되는 경우는 적다고 한다. 영국 건강사회 안전국에 따르면 1971년과 1981년 사이에 거래된 약품을 검토해본 결과 새로운 약품은 치료적 필요보다는 상업적 수익을 지향하고 있다고 한다.(109)
LD50(lethal dose 50 percent)이라는 급성 독성 실험은 연구대상이 되는 동물의 절반이 죽게 되는 물질량을 일컫는다. 동물들은 절반이 죽음에 이르기 전에 모두 심각한 병에 걸리며 격심한 고통을 받는데, 이런 실험은 인간이 제품을 사용할 것인지 여부와는 상관이 없고 오직 동물들의 절반을 중독사로 몰고갈 물질의 양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다.(110)
드레이즈(Draize) 눈 자극 실험은 토끼의 머리를 조임장치에 고정시켜놓고 표백제, 샴푸, 잉크 등과 같은 실험재료를 눈에 투입하는 것인데, 3주까지도 지속될 수 있는 이러한 실험은 염증과 출혈로 토끼에게 고통을 준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보고하는 의사의 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협회가 보증한 응급처방 의사로서 우발적 중독과 독극물에 노출되었을 때의 처방에 대해 17년이 넘는 임상 경험을 한 바 있다. 그런데 나는 드레이즈 실험자료를 참고하여 눈의 상처에 대한 처방을 내리는 응급 처방 의사를 본적이 없다.”(116)
동물실험에 반대하는 운동의 결과 일부 화장품 회사들은 동물실험을 중단하게 되었고 <과학Science>지에서도 “세포 및 조직 배양과 컴퓨터 모델링과 같은 대안들은 단지 대중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그리고 과학적으로도 바람직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했다.
미국의 연방 기관은 1983년이 되어서야 살아있는 토끼의 눈에 양잿물, 암모니아, 오븐 세척제와 같은 부식성 자극제로 알려진 물질들을 투입하는 실험이 필요치 않다고 발표했다.(121-22)
동물을 실험용으로 사용하지 않을 수 있는 대안적 연구들을 위한 투자가 별로 행해지지 않고 있는 것은 동물이 인간을 위해 도구화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인간중심적 감수성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중심주의가 여성을 도구화, 타자화하는 남성중심주의와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임을 확인하기는 어렵지 않다.
2) 여성억압과의 연관성
여성에 대한 성적학대와 동물학대는 다양한 차원에서 연관되어 있다. 첫째, 성적학대의 대상이 되었던 여성과 어린이들은 피해를 받는 과정에서, 남성 가해자가 이들을 통제하고 위협하는 수단으로 동물(주로 애완동물)을 위협하거나 실제로 죽이는 상황과 직면하곤 한다. 둘째, 성폭력을 당하는 과정에서 동물이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되곤 한다.
즉 동물과의 강제적인 관계를 갖게 하는 경우를 말한다. 셋째, 성폭력을 경험한 어린이들이 동물을 학대하게 되는 것에서처럼, 성적인 학대는 피해자의 동물에 대한 태도에 특정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이러한 성향은 이후에 성폭력과 살인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내포한다.(아담스,1994:146]
포르노의 한 장르는 여성과 동물간의 성관계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는 단순히 여성의 몸이 동물과 동일시되고 있다는 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동물들도 그들의 몸으로 환원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스펠만(Elizabeth Spelman)에 따르면 신체혐오증(somatophobia)은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 종차별주의를 드러내고, ‘경멸받는 몸들’에 대한 적개심은 상호얽혀있다. 서구의 철학전통에서 나타나는 영혼/몸의 이분법은 동물을 영혼이 없는 존재로 봄에 따라 그들을 소비재라는 수단으로 존재화시킨다.
또한 현대의 포르노에서 (백인)여성과 동물이 연결지워질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전에 흑인여성이 동물로 묘사되었던 맥락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여성, 어린이, 동물에 대한 학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비가시화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동물의 몸 먹기’(육식), 사냥, 동물실험과 같은 동물학대는 그것이 문화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비가시화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화된 비가시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관계적 인식론(relational epistemology)이 요구된다.
예를 들어 한 여자는 남편으로부터 죽음의 위협을 느끼는데도 그는 그녀를 사랑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는데, 이를 통해서 그녀는 자기가 동물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동물을 먹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자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Adams, 1994:145-154) 가축사육은 특히 암컷에 대한 착취임을 앞서 보았다.
우유, 계란, 보다 많은 새끼 낳기 등은 생명을 생산하는 여성적 기능에 대한 착취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또, 동물 복제실험과 같은 생명공학의 발달은 인간배아에 대한 연구로 이어지면서 여성과 인간의 몸을 도구화시키는 데에까지 이르고 있다. 따라서 억압을 가져오는 인식과 태도는 다양한 맥락들 속에서 통합적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사창가를 둘러본 사람들은 흔히 그 풍경을 정육점에 비유하곤 한다. 붉은 조명 아래 진열되어 있는 ‘아가씨’들은 손님이 보고 고를 수 있도록 최대한 구미에 맞게 포장되어 있거나 적당히 벗겨져 있다. 정육점에서는 동물들이 이미 죽어있다는 차이가 있지만, 사창가의 여성들도 ‘사회적으로’는 죽은 몸들이나 마찬가지이다.
사창가의 여성들이 손님들을 밝은 웃음으로 유혹하고 있듯이, ‘고기화’된 동물들도 제품 포장지나 광고에서, 그리고 고깃집 간판에서 밝게 웃고 있다. 모두들 먹어주기만을 바라고 있는 듯하다. 여성을 성적으로 소유하는 행위를 ‘먹었다’고 표현하는 사실은 양자간의 유사성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겉으로 드러나는 매춘여성의 미소를 근거로 남성은 그녀를 성적으로 이용하고 착취하면서도 마음을 편하게 가질 수 있다. 이마저도 용이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녀를 경멸하면 된다. 가장 억압받는 존재에게 가장 심한 경멸을 퍼부음으로써 면죄부를 받으려는 것이다.
동물의 경우에도 ‘동물적’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대상에 대한 경멸을 통해서 그 대상을 착취하는 주체의 책임이 은연중에 회피되는 경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의 야만성을 간과하며 다른 동물들의 그것을 과장해왔던 것이다”.(싱어:373)
사창가에서나 정육점에서나, 여성은 존재하지 않고 동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지시대상의 부재’(absent referent)(Adams, 2000:2장참조)는 소비자의 편의를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매춘여성은 가명을 사용하여 사회적으로는 익명적이고, 소비자는 그녀의 개인적 삶의 궤적을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고기’라는 용어는 동물의 개별적인 실제 삶을 한낱 고기덩어리로 추상화시킨 것이다.
‘고기’의 출처가 살아있는 동물이자 독자적인 개성과 기질을 가진 존재였다는 사실이 은폐된다. 그리하여, “고기는 포르노와 유사하다, 그것이 누군가의 즐거움으로 되기 이전에 그것은 누군가의 삶이었”던 것이다.(Adams, 1994:53)
포르노 사이트에 나타난 영상물에는 여성의 가슴만 보여주는 코너, 성기만 보여주는 코너 등으로 나뉘어지는 등, 몸의 부위와 연령대, 인종, 몸에 가해지는 새디스트적 행위의 종류 등이 마치 메뉴처럼 고를 수 있게 되어있다.
소의 몸을 부위별로 골라서 구매하는 데에 익숙해진 소비자에게 이러한 분절화는 정당한 소비행위에 대한 권리로 인식되는 것처럼, 여성이라는 소비대상에 익숙해진 주체들에게 역시 유사한 무감각이 자리잡게 된다.
따라서 여성주의는 여성에 대한 성적 억압이 취하는 동물적 은유들을 드러내는 데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그 은유 이면에 존재하는 동물들의 현실에 주목함으로써 다양한 억압들이 어떻게 문화적으로 동시에 생산되는지를 드러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것은 물질과 영혼이 어떻게 폭력적으로 이분화되고 있는지를 자각하는 일을 뜻한다.
사창가에서 창녀가 동물취급받는다는 말은 마치 여성이 영혼이 없는 고기덩어리로 여겨진다는 말을 의미하는데, 여기에는 영혼이 없는 동물과는 달리 여성은 영혼이 있다는 데에서 오는 분노의 감정이 들어있다.
다시 말해, 여성의 인간성과 동물의 자연성(즉 영혼없음)이 여전히 대비되고 있는 셈이다. 서구 중세시대의 신학자들은 여성에게도 영혼이 있을까를 놓고 논쟁을 벌였었다. 지금 이 시대는 동물에게도 영혼이 있을까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는 시대인 듯하다.
여성주의가 가축제도의 이면에 있는 지배논리를 포착하지 못한다면, 경계선의 ‘이동’으로 환원되는 많은 해방논리들의 한계를 그대로 답습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캐롤 아담스는 성-종체계(sex-species system)라는 개념으로 ‘이성적’ 백인 남성이 여성 및 동물의 몸에 대해 행사하는 지배를 설명한다.(Adams, 1995:176)
고기를 먹는 사람들 중에 자기가 직접 돼지를 잡아서, 살겠다고 괴성을 지르는 것을 목을 따서 죽이고 칼로 배를 갈라서 내장을 꺼내고 요리를 해서 먹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이러한 행위는 신분이 천한 이들에게 귀속되어왔다.
과거에 양반들은 자신의 감수성에 거슬르는 일은 백정에게 전가시켰고, 자기네들은 고기를 먹으면서도 백정에 대한 경멸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오늘날 도축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열악한 조건에서 상해를 당하고 가장 높은 이직률을 보여준다.
인간이 동물을 착취하는 과정은, 그 속에 또다른 피지배층에 대한 착취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동물에 대한 착취는 동시에 동물과 유사한 방식으로 취급되는 집단들 - 창녀, 유태인 학살, 인디안 원주민 학살, 흑인 노예화, 기타 하층집단들 - 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작용해왔다.
3) 자연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육식을 단순히 기호나 문화로 바라보는 관점에 익숙해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까지의 논의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여성억압에 대한 강의를 들은 남학생들의 일부 혹은 상당수가 거부감을 느끼는 현상과 유사한 맥락이다.
왜냐하면 갑자기 가해자라는 비난을 받은 것 같은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 막상 스스로는 그런 책임감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로 통합되어 있던 부분에 대해 비판적 거리두기를 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자신이 동참하는 억압이 제도화되어 있을 때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지배체계의 특징은 그것이 자연스러움에 호소하여 스스로를 정당화한다는 것이고 폭력을 제도화시킴으로써 그 자연스러움을 극대화시킨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동물을 도구화하고 착취하는 과정에는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억압체계와 유사한 메카니즘이 작용한다. 캐롤 아담스에 따르면 육식이라는 제도화된 폭력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여준다.(Adams, 1994:164)
(1) 타자의 불가침성을 침해하거나 인정하는 데에 실패한다.
(2) 물리적 손상과 처우남용을 행한다.
(3) 폭력을 은폐시키는 일련의 부인하기 메카니즘을 갖는다.
(4) ‘적합한’ 희생자의 타겟을 정한다.
(5) 사회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6) 소비자로 하여금 이 과정에 대해 수동적이 되게끔 조종한다.
여성이 남성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존재론적 의의를 갖는 것이 아니듯이, 동물들은 인간에게 먹히기 위해, 가죽을 제공하기 위해, 실험용으로 고통받기 위해, 동물원에 갇혀서 구경거리가 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제도화된 폭력은 이 모든 것을 자각하기 어렵게 만든다. 동물의 시체는 ‘고기’라고 불리워지고, 실험용 동물의 살해는 ‘처리’에 지나지 않게 된다. 어미에게서 새끼를 빼앗는 것도 당연하게 여겨진다. 또, 식용으로 이미지가 구성된 가축들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의미의 ‘동물보호’ 개념조차 적용되지 않는다.
마치 강간해도 되는 여성(매춘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을 구별하는 이데올로기처럼, 때로는 TV에서 야생동물보호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쏘세지를 먹고 있는 장면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성폭력에 적합한 희생자가 존재하지 않듯이, 종폭력에 적합한 동물이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유년기부터 교과서에 나와있는 ‘고기’의 합법성은 무의식 차원에서부터 문제제기를 묵살시키게 한다. 어린이가 소가 불쌍하다고 쇠고기를 안먹겠다고 하면 잔소리 말고 빨리 먹으라는 부모의 명령이 떨어질 뿐이다.
서구의 근대적 가부장적 지배체계는 타자성에 기반해서 대상을 지배하는 주체개념을 강화해왔다. 남성/여성, 인간/동물(자연), 이성/감정, 서구/비서구와 같은 이분법들은 억압을 정당화하는 논리로서 결합되고, 인종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는 인간중심주의라는 틀 속에서 정당화되곤 한다. 즉 인간이 타자화시키는 동물이라는 대상의 범위가 변화해왔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배체계가 긋는 선을 놔둔채 특정 대상만을 이동시키는 일은 근본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 여성과 흑인 및 기타 집단을 ‘인간’이라는 지배집단으로 편입시키는 작업은 한계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지배집단과 피지배집단을 구분하는 패러다임 자체가 끊임없이 특정 존재들을 피억압자로 재생산하기 때문이다.[이에 대해서는 여성주의 이론내에서의 시민권 논의들을 참조할 것.] 따라서 특정 집단이 동물취급을 받고 있다면 여기서 더 나아가서 동물을 ‘동물취급’하는 일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특정 집단이 다른 집단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항상 ‘자연적인’ 차이에 기반한 논리가 사용되곤 했다. 그러나 자연적인 것 자체에 대한 재개념화가 요구된다. 무엇이 자연적인 것인가는 항상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문제이다.
어머니가 아이를 돌보기 위해 사회생활을 하지 않는 것은 생물학/자연의 관점에서 이해될 일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 성역할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돼지가 비좁은 우리에서 할일없이 사료를 받아먹고 살만 찌우는 것은 가축으로서의 자연스러운 본성의 관점에서 이해될 일이 아니라, 가두어놓은 채 음식을 찾아 다니는 행위를 할 수 없도록 차단시켜 놓은 인간들의 통제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돼지에게는 더럽고 게으르다는 이미지가 덧씌워져있지만, 사실은 개보다도 아이큐가 높고 매우 사교적인 동물이라고 한다.(로빈스:120) 또, 자연상태에서는 여느 숲 속의 동물처럼 천성적으로 깨끗하고, 가능한 한 돼지는 자기네 잠자리와 먹이와 거주지를 더럽히지 않는다고 한다.(122)
그러나 돼지를 삼겹살 만드는 기계 쯤으로 생각하는 인간의 관점에서는 돼지의 삶에 대한 인식은 왜곡되게 마련이다. 이는 매춘여성을 성욕을 주체하지 못하는 음탕한 모습으로 재현시켜내는 메카니즘과 동일하다.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보면 정치, 경제, 가정 간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동물을 자연의 영역에 제한시켜놓는 관점은 여전히 이러한 구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죽은 동물들을 구매하는 일은 가정내의 사적인 선택으로 여겨지고, 동물을 생산하는 것과 관련된 이슈들은 경제적인 것으로 돌려지는 것이다.
그런데 동물에 관한 그 어떤 논쟁도 문화적 맥락 속에서 발생하듯이, 인류를 육식동물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정치적인 것을 자연적인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육식 권하는 사회에서는 실제로는 정치적인 결정들이 자연적이고 불가피한 것으로 제시된다.(Adams:1993)
오늘날 담배회사들은 제품에 경고문을 적도록 되어 있다. 담배산업은 의학적으로 점점 더 지지받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담배업계는 흡연이 암을 유발하는가라는 문제는 아직 답을 얻지 못한 질문에 불과한 것임을 국민들에게 설득하려고 한다.
마찬가지로 육류 및 낙농, 양계업계는 포화지방 및 콜레스테롤이 심장질환의 원인이라는 증거가 충분히 축적되었다는 사실을 국민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고 있다.(로빈스:32)
“그 전투의 한쪽에는 육류와 양계 및 유제품 생산업자들의 경험 많은 동맹군과 그들이 매수한 정치적 과학동맹군이 함께 포진하고 있는 반면, 다른 한쪽에는 상대적으로 조직화되지 못한 독립적 의료연구진과 재정적으로 빈약한 공공 소비자 집단, 그리고 정치적으로 인기없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상당한 위험부담을 기꺼이 감수하려는 몇 안되는 정치지도자들이 드문드문 서있다.”(35)
1984년 미국 연방정부는 의학사상 가장 광범위하고 많은 비용을 들인 연구 프로젝트의 결과를 발표하였는데 식단에서 콜레스테롤과 지방을 줄일수록 심장질환의 위험도 줄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76]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육류 및 낙농, 양계업계가 워낙 노력을 기울인 탓에 이 소식을 듣지 못한채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육류를 섭취해야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심장마비와 뇌일혈을 풍요와 노화가 가져오는 피할 수 없는 부산물 정도로 생각하는 소극적인 태도는 심장질환을 일으키는 식품을 판매하여 이익을 챙기는 이들의 의도적인 노력의 결과인 것이다.(79)
모든 ‘과학적’ 연구의 결과는 특정 동기 및 의식수준에서 결정된다.[의식혁명 참조] 동물에 대한 인간(남성)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합리성에 관한 논의의 이면에는, 공격성과 성충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숫컷(인간)의 ‘동물적’ 본성을 강조하는 논의들도 있다.
어떤 의식수준에서, 무엇을 위해, 무엇을 연구하는가에 따라 우리 앞에 펼쳐지는 가능성의 세상은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게 마련이다. 여성을 억압하는 체계를 토대로 해서 남성들간의 평등을 마련하는 노력의 한계를 이해할 수 있다면, 비인간 동물을 억압하는 체계를 토대로 해서 인간들간의 평등과 복지를 증진하려는 노력의 한계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4. 채식의 여성주의적 의미
그렇다면 여성주의자에게 동물들은 어떠한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여성주의자들은 모두 채식을 해야 하는가? 그러나 식물도 생명이 아닌가? 식물에 대한 도덕적 고려는 안해도 되는가? 이와같은 일련의 질문들에 답하기 이전에 먼저 동물에 대한 윤리적 관점들을 정립시킨 논자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1) 기존의(남성의) 동물 옹호 관점들
[동물해방](1975)이라는 저서로 유명한 피터 싱어는 동물을 인간과 평등하게 대해야 하는 근거로 그들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들었다.
“만약 한 존재가 고통을 느낀다면 그와 같은 고통을 고려의 대상으로 삼길 거부하는 자세를 옹호할 수 있는 도덕적인 논증은 있을 수 없다. 한 존재의 본성이 어떠하든, 평등의 원리는 그 존재의 고통을 다른 존재의 동일한 고통 - 대략적이나마 비교가 이루어질 수 있다면 - 과 동일하게 취급할 것을 요구한다.
한 존재가 고통을 느낄 수 없다면, 또는 즐거움이나 행복을 누릴 수 없다면 거기에서 고려해야 할 바는 아무 것도 없다. 그리하여 쾌고 감수(感受)능력(limit of sentience)은 타인의 이익에 관심을 가질지의 여부를 판가름하는, 우리가 옹호할 수 있는 유일한 경계가 된다. 지능이나 합리성 등과 같은 다른 특징으로 경계를 나눈다는 것은 임의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가령 피부색과 같은 다른 특징을 경계 기준으로 채택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인종차별주의자들은 자신이 속한 인종의 이익에 더 큰 비중(자신들의 이익과 다른 종족의 이익이 충돌할 때)을 두고 있다는 측면에서 평등 원리를 위배하고 있다. 성차별주의자들은 자신이 속한 성의 이익을 우위에 둠으로써 평등 원리를 위배한다.
이와 유사하게 종차별주의자들은 스스로가 속한 종의 이익이 다른 종의 보다 큰 이익을 능가해도 그것을 눈감아 준다. 이 모든 경우에 문제의 패턴 자체는 동일한 것이다.”(44-45)
싱어에 의하면 서로 다른 종 구성원들끼리의 정확한 고통을 비교하는 것이 불가능할지라도, 정확성이 본질적인 것은 아니며, 인간이 침해받는 이익보다 동물이 침해받는 이익이 확실하게 클 경우에만 동물에게 가하는 고통을 방지하려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식사를 비롯해 영농법, 과학실험, 야생동물보호, 사냥 등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켜야 하고 모피, 서커스, 동물원 등도 재고해 보아야 한다고 한다.(57)
다른 한편 식물도 고통을 느낄 수 있지 않는가라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싱어는 동물이 고통을 느낀다는 근거로 행위, 신경체계의 특징, 고통의 진화적 유용성을 제시했는데, 식물의 경우 고통을 느낀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행위를 발견할 수 없고, 중앙 신경체계가 없으며, 죽음을 피하기 위해 고통의 지각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개발했다고 보기 힘들다고 한다.
그런데 설령 고통을 느낀다는 증거가 발견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동물을 먹어도 무방하다는 결론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육식은 채식에 비해 식물을 최소한 10배 이상 파괴하기 때문이다.(394)
고통의 최소화를 강조하는 싱어의 공리주의와는 달리 톰 리건은 동물들이 인간들처럼 양도될 수 없는 권리를 지닌 도덕적 주체라고 주장한다. 리건은 공리주의적 관점으로 동물을 옹호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고 보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오히려 종차별적인 실천들을 정당화하는 데에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리건이 싱어에 대해 제기하는 비판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의 이익을 똑같이 인정을 하면서도 사람들을 다르게 대우하는 것이 가능하다. 즉 다르게 대우한다는 것이 그 자체로 이익의 평등한 고려의 원리를 위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익의 평등한 고려의 원리와 최선의 결과 사이에는 아무런 필연적 연관이 없기 때문에 공리주의 원리는 집단들간에 근본적으로 다른 대우를 하기 위해 이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두 집단의 이익을 동등하게 인정하면서도 특정 차별이 공리주의적 차원에서 최선의 결과를 가져온다고 주장함으로써 차별을 옹호할 수 있다.(Regan:1980) 즉 공동체 전체의 고통 대비 즐거움의 양을 최대화할 때 고통이 주로 동물에게 편중될 수 있음을 원리적으로 허용한다는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은 그 자체가 목적으로서 존재하며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성능력에 근거해서 인간은 이러한 권리를 지닌 도덕적 주체로 간주된다. 그런데 인간 도덕적 피행위자(정신지체가 심한 경우 등)라고 해서 수단으로 대우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도덕적 행위자나 피행위자 모두 권리개념에 내포된 존중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인데, 비인간 도덕적 피행위자(동물) 역시 여기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리건에 의하면 동물을 목적으로서 대우하는 일은 정의의 문제이며 도덕적 의무인 것이다.
리건은 이성능력에 근거해서 ‘본질적 가치’를 부여하는 칸트와는 달리 ‘삶의 주체’이어야 한다(be subject of a life)는 기준을 제시하는데 이것은 적어도 1세 이상인 정상적 상태의 포유류 동물에 한정된다.(Donovan, 1993:170) 따라서 동물들을 사육한다는 것은 아무리 좋은 방식으로일지라도 그들을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 된다.
다른 한편 전체론적 환경윤리론자들에 의하면 싱어나 리건처럼 개체론적 접근법을 취할 경우 각각의 유기체에 대한 배려가 생태계를 오히려 왜곡시킬 수도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야생에서 토끼를 보호할 경우 그들을 먹고 사는 일부 동물은 굶어죽을 것이고 이것은 연쇄적으로 생태계의 먹이사슬을 차단하여 생명 에너지 흐름을 끊어놓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것이다.(한면희:277)
이에 대한 복잡한 논의를 여기서 다룰 수는 없지만 나는 이 문제를 염두에 두더라도 채식에 관한 관점이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싱어는 다른 동물이 다른 동물을 포식하는 것에 대해서는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보았는데,(싱어:379) 어찌되었든 사슴을 포식하는 사자와 소를 먹는 인간은 같은 선상에서 비교될 수 없다.
우리가 고릴라같은 채식동물보다 굳이 사자같은 포식동물과 스스로를 동일시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사자를 채식주의자로 만들 수 없다는 판단에 대한 강조는 우리가 채식주의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변명에 가까울 것이다.5)
또, 인간들이 모두 채식을 하게 된다면 가축동물들이 멸종하리라고 걱정하거나(Adams, 1994:115), 어쨋거나 약탈자에게 노출된 야생의 상태보다는 나은 환경에서 살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싱어:379) 그러나 이것은 일종의 제국주의적 논리에 다름이 아니다. 이처럼 해방자(?)를 자처한 논리는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2) 보살핌의 윤리학
여성주의자들은 채식과 동물의 존엄성을 옹호하기 위해 위의 논의들과 구별되는 논의를 제시하고 있는가? 가장 큰 차이점은 윤리학 자체에 대한 관점에서 온다고 할 수 있겠다. 싱어와 리건은 벤담의 공리주의, 칸트의 의무론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여전히 이성을 우위에 두는 정의의 윤리학 전통에 서있는 것이다.
이들은 이론적 정합성과 일관성을 꾀하고, 인간에 대한 대우와 동물에 대한 대우를 비교하여 공평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데에 주력한다. 그러나 보살핌의 윤리학의 관점에서 동물의 착취에 반대하는 것은 인간과 동물에 대한 비교에 기반해서가 아니라, 동물들에 대한 남용(abuse) 그 자체에 대한 고려에서 나오는 것이다.
동물에게 행해지는 폭력에 반대하는 이유는 인간에게 행해진 폭력과 비교해서가 아니다. 물론 인간에게 행하는 폭력에 대해서도 반대를 하겠지만, 인간은 보호를 받는데 동물은 보호받지 못한다는 식의 형평성 문제에 초점이 놓여있는 것이 아니다.(Luke, 1992: 81-82)
보살핌의 윤리학은 캐롤 길리건에 의해 담론화된 이후로 여성주의자들에 의해 많이 논의되어왔다. 이 관점에서는 도덕주체는 보살핌의 자질을 지닌 관계적, 상호의존적 존재로 인식된다. 이성적 동의보다 감성적 공감이 도덕적 가치로서 중시되고 구체적 상황 속에서 관심을 행동으로 옮김으로써 타자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된다.
따라서 동물 해방을 위해서 사람들을 이성적으로 설득하는 것에 가장 큰 비중을 두지는 않는다. 논리와 지식은 중립적인 마음 위에서 접수되고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마음과 감정이 특정 논리와 지식을 수용하는 것을 가능케하기 때문이다.6)
싱어와 리건은 동물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동물을 존중하도록 합리적으로 설득해낼 것인가에 힘을 모았는데, 보살핌의 관점에서는 사람들이 동물에 대해 따뜻한 마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동물에 대한 착취가 지속되고 있는가라는 문제에 주목한다.
따라서 동물을 착취하는 자들의 논리적 모순을 공격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동물에 대해 느끼는 연민을 드러나지 못하게 하고 차단시키도록 조작하는 장치들에 대해 저항하는 일이 중요하게 대두된다.(Luke, 1992:88) 사람들은 동물에 대해 공감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동물을 착취하는 제도들은 “무지를 지속시키고, 두려움을 촉진시키며, 잔임함을 보상하고, 친절함을 처벌”(Luke, 1992:100)하는 장치들을 발전시켜왔다.
동물실험에서도 표면적으로는 전혀 고통을 말하는 것 같지 않게 보이면서 사실상 고통을 지시하는 상당수의 용어들을 개발해내야만 했던 것이다.(싱어:106)
보살핌의 윤리학의 관점에서 채식을 옹호하는 페미니스트들은 권리개념에 기반한 동물권 이론이 다음과 같은 한계를 갖는다고 본다.
첫째 동물과 인간의 차이보다 유사성에만 초점을 맞춘다. 둘째, 권리이론이 전제하는 존재론은 동등하고 자율적인 주체들인데 길들여진 동물들은 인간에게 의존하는 관계에 놓여있다. 자율적 주체라는 설정의 한계는 인간사회 내에서도 페미니스트들이 제기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셋째, 권리이론은 감정을 평가절하거나 억제한다. 그러나 인간이 동물에 대한 감정적 반응을 억제하기 때문에 동물에 대한 폭력과 착취가 계속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동물을 옹호하기 위한 윤리학에서 감정을 부적절한 요소라고 배제하는 일은 모순적이다.
넷째, 권리이론이나 공리주의는 보편화될 수 있는 원칙이나 수량화될 수 있는 판단에만 의존함으로써 추상적이고 형식주의적이 되는 경향이 있다.(Donovan&Adams, 1996 :14-15)
보살핌 이론은 어머니/자녀, 간호사/환자 등과 같은 불평등한 관계로부터 발전되었기 때문에 인간/동물 관계에 더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판단의 기반이 되는 것이 감정이라는 점을 인정하기 때문에 보다 가까운 대상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게 한다 할지라도, 적어도 권리이론과는 달리 이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합리주의적 윤리학이 표방하고 있는 이성적 판단의 객관적 적용은 사실 은폐된 또는 자각되지 않은 감정에 기반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권리의 부여는 항상 가장 가깝게 인지되고 심리적 공감이 가능했던 집단에게 우선적으로 주어졌다.(16)
우리는 합리적 판단을 내리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속에는 이미 가깝고 먼 관계들이 차별적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마음이 허용하는 만큼만’ 평등을 ‘합리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격이다.
윤리학은 이성적 판단의 문제이기 보다는 실천적 경험의 문제라는 사실이 인정될 필요가 있고 페미니스트들은 일반적으로 개인적 감정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도덕적 선택의 과정에는 자신을 직접적으로 참여시키는 작업이 장려되어야 한다. 만일 고기를 먹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느낄 경우, 도살장을 방문하면서도 동일한 판단(감정)을 유지할 수 있는지를 확인해보는 것도 유의미할 것이다.(Kheel, 1985:27)
맥락에서 떨어진 추상화된 합리적 판단은 ‘식물도 생명이다’라는 류의 반론을 펴는 데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여기에는 여러 답변이 주어질 수 있을 것이다.
살생(업 즉, 중첩되는 오라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그나마 채식이 바람직하다는 공리주의적 답변이나, 식물은 동물과는 달리 자신을 내어주는 높은 수준의 영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식물을 먹을 권리가 있다는 류의 명상수행적 관점의 답변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 외에도, 우리가 논리다발 이상의 존재라는 사실이 상기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개고기에 관한 논쟁에서 간단하게 예를 들어보겠다.
개고기를 합법화하자는 일부 국회의원들의 주장을 발단으로 해서 인터넷상에서 전개된 논쟁들을 보면 두드러진 특징이 하나 있다. 반대와 옹호가 명확한 일부를 제외하면 상당수의 사람들이 본인은 개를 좋아하고 개고기를 먹진 않지만 개고기를 반대할 만한 논리를 세울 수 없기 때문에 개고기를 먹는 문화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할 수 없다는 무력감 내지는 씁쓸함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소, 돼지, 닭을 먹으면서 개는 먹을 수 없다는 논리는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인간이 개라는 동물과 맺어온 특별한 관계에 대한 고려가 빠져있고 누구나 한번쯤은 개를 쓰다듬으며 친근함을 느껴본 적이 있고 의사소통을 해왔다는 사실이 배제되어 있다.
따라서 자신의 개에 대한 감정이 돼지에 대한 감정과 명백히 차별화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형평성의 논리에 따라 이를 묵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필자 역시 이와같은 추상적 논리 때문에 죽음을 당하는 개들을 생각하며 가슴이 아팠지만 어쩔 수 없다고 여겼었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서 나는 개인적인 사건을 통해 개의 죽음을 직접 구체적으로 접하는 경험을 계기로 ‘개고기’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구체적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적 논리와, 구체적 체험을 거친 현실 인식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원칙중심적인 형평성은 우리의 현실이 차별화된 감정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외면한다.
평등의 이상(ideal)은 어디까지나 해방적 관심에 기반해야 하지, 억압을 평준화하는 데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수가 가슴 아파하고 불쌍히 여기지만 소수가 식도락을 위해 즐기는 그런 관습이 유지된다는 건 다수가 자신의 감정을 억제한 결과이며 그 피해는 그들에게 돌아간다.
‘식물도 생명이다’라는 반론은 동물의 생명과 죽음에 대한 구체적 감정을 배제시킨 추상적 논리일 뿐만 아니라, 동물 살생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해보기를 거부하려는 의도에서 등장하는 논리에 가깝다.
이러한 의도가 강력할 때에는 감정 자체가 억압당해서 아예 느낌이 없게 되기도 하는데, 특정 대상의 이익에 반해서 자신의 특정 필요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또는 그래야만 하는 상황에서는 대상에 대한 감정이입은 무의식 수준에서 차단되기 때문이다.7)
일반적으로 잔인하다고 여겨지는 행동을 하는 많은 이들에게 그 잔인함은 본성이나 기질이 아니라, 자신의 특정 필요를 위해 대상으로부터 감정적 교감의 가능성을 철저하게 차단시킨 결과이다. 집단적으로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극단적인 예가 전쟁일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초래해야만 하는 ‘필요’가 과연 어떤 인식수준에서 정당화되는 ‘필요’인지를 성찰하는 일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채식에 대한 논의는 바로 육식이라는 ‘필요’에 대한 성찰을 하고자 하는 논의이다. 이것은 진공상태에서의 논의가 아니다. 이미 육식사회에 길들여진 주체들이 스스로의 실천의 결과의 폐해에 대해 고통스러워한 결과 이 실천이 과연 어떤 정당한 ‘필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를 비판적으로 성찰해보자는 것이다.
5. 맺음말 : 페미니스트는 채식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페미니스트는 채식을 해야 하는가? 나는 이 질문이 페미니즘 자체에 대해 시사해주는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페미니스트는 결혼을 해도 되는가? 나는 이와같은 질문은 올바름에 대한 왜곡된 이해에서 비롯된 부적절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억압과 소외에 대한 문제의식이 곧바로 특정 도덕적 삶에 대한 모델과 직결되어서는 곤란하다. 올바른 행동의 강령을 세우려는 시도는 항상 억압적이게 마련이다. 채식하면서 평생을 잘 살아가는 사람이 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육식하지 말자는 권고가 억압적일 수 있다.
캐롤 아담스는 페미니스트 모임에서 채식을 실천하는 것에 대해 강조해왔다.(Adams, 1993) 그녀는 우리가 자연적이라고 생각하는 실천들이 정치적인 것들임을 여성문제와의 연관성 속에서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내 생각에,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페미니즘의 명제는 사적영역에서의 억압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지, 사생활에 대한 새로운 규범을 강요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정치적인 영역을 벗어난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기도 하고, 따라서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자각이기도 하다.
즉 ‘나’는 사소한 일에까지 구조적으로 영향(억압)을 받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사소한 일을 통해서도 구조에 영향(변화)을 미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채식위주의 생활을 선택한다는 것은 분명히 정치적인 실천이다. 그러나 선택은 각자가 하는 것이고 우리는 서로의 선택을 존중해주어야 한다.
서로의 선택을 존중해준다는 것은 상대의 선택의 결과로 인해 자기가 받는 피해 혹은 고통을 감수한다는 것을 말한다. 페미니스트는 가부장적 인식을 가진 사람들의 선택을 존중해야 하듯이,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올바른 선택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나은 선택이 존재한다고 보는 관점에서 페미니즘을 접근한다면 ‘정치적 올바름’의 폐혜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8)
나는 페미니즘은 합의의 문제가 아니라 공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또한 증명의 문제가 아니라 열망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내가 페미니스트인 이유는 여성이 남성과 평등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 아니다. ‘사실’은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념에 의해 창조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평등은 대상들의 동일한 가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대상들을 똑같이 존중하려는 주체의 마음가짐에서 오는 것이다. 존중하는 마음에는 대상의 특수성에 대한 지식이 축적될 여지가 생긴다. 따라서 차이에 대한 인식이 차별로 이어지지 않는다.
또, 원칙에 대한 예외가 부정의(injustice)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평등의 이념은 대체로 존중하는 마음이 없는 주체들에게 이성중심적인 방식으로 ‘존중’을 ‘설득’해내는 합리적 작업에 다름 아니었다. 마음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을 머리에게 강요할 때 행동은 경직된 그 무엇으로 변해버린다. 그것은 규범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마르티 킬의 말처럼, 우리는 인간이 돌맹이보다 가치롭다고 느끼지만 그것을 합리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Kheel, 1985:31) 동물들에게 내재적인 가치를 부여할 것인가의 문제는 그들의 쾌고감수능력이나 아이큐를 증명해서 결정될 문제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우리와 유사한 척추동물들에게 더 많은 공감대를 느끼지만 조개의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서 채식주의자가 된 사람도 있다. 또, 식물, 무생물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도 있다. 어느 정도로 무엇에까지 공감대를 느낄 수 있는가는 합의해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공감대의 경계선이 변화과정에 있고 이를 통해 역사의 성숙(?)함을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
에코페미니즘은 여성과 자연에게 행해지는 착취 혹은 ‘존중하기의 실패’가 왜 모두에게 억압적인가를 보임으로써 결국 모두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가해자(집단)에 대한 분리적 사고도 적용되지 말아야 한다.
사실,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동물억압의 현실은 참아내기 힘든 작업일 수 있다. 페미니스트에게 여성억압의 현실이 참아내기 힘들 때가 많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가해자(집단)가 체험적인 인식을 바꿀 수 있도록 인내심을 갖고서 영향을 주는 작업을 하겠다는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은채 섣불리 이성에 호소하는 작업에만 치중한다면, 그것은 또다른 ‘합리성’들을 난무시키는 전투장으로 변해버릴 수 있다.
페미니즘이나 동물해방운동은 억압과 편견을 가진 사람들과 한판 승부하기 위한 게임이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통해 이들과 공감대를 넓혀나가기 위한 자조 공동체가 아닐까 한다. 그리고 억압과 편견을 가진 사람들을 ‘설득’하기 이전에 그들에 대해 ‘공감’을 하는 작업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다시 말해 피억압자들 뿐만 아니라 이들을 억압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공감하기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채식은 동물에 대한 공감에서 하는 것이지만 채식주의는 그 동물들을 먹고 억압하는 내 이웃들에 대한 공감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9) 다행인지 불행인지, 살면서 동물억압에 공모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인류의 부족함에 대한 연민이 우리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면 채식주의는 모든 사회운동을 ‘무공해 운동’으로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여기서 ‘무공해’라 함은 운동주체와 계몽대상을 분리시키지 않음으로써 작용과 반작용의 ‘공해’를 생산해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내가 경험하는 억압적 현실에는 항상 나의 도장이 찍혀있음을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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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내가 가축제도와 동물실험에 대해 비판적이 되면서 채식을 하기에 이른 것은 14년 동안 키운 개를 안락사시킨 경험이 발단이 되었다. 그 경험을 통해서 나는 안락사가 결코 ‘안락’한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동물의 고통과 죽음은 인간의 그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토록 아끼던 개를 안락사시키고 나서 스스로 받은 상처는 너무나 깊었다. 아무리 아파서 죽어가고 있다할지라도 사람이었다면 하지 않았을 ‘안락사’를 하게 된 것은 동물에 대한 사회적 규범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중심적 사고는 인간에게도 억압적이다. 연결되어 있는 것을 분리시키는 모든 사고가 그렇듯이. 쩨리가 내 삶에 들어온 이후로부터 나는 여성문제에 대해 직면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인간인 내가 쩨리(동물)와 맺는 불평등한 관계를 성찰하면서 남녀관계의 억압구조에 대해서 많은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쩨리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면서 결국은 이기적인 방식으로 취하고픈 것만을 취한 나의 태도는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남성이 여성을 사랑하는 방식과 닮은 데가 많았다. 여성억압의 현실을 깊이 이해하고난 이후에야 동물억압의 현실 역시 실감하게 되었는데 이 두가지를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 것은 쩨리였다. 쩨리는 내 삶의 큰 스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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